길 위에서 나눈 대화 50

고생하면서 살다보니 어느새 늙어버렸네 - 안영순이 살아온 삶

1. 부모님은 없었지만 행복하게 자랐던 어린 시절 안영순은 1948년 북제주군 애월면 고내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는 할머니와 부모님, 두 명의 언니들이 같이 살고 있었지만 안영순이 갓난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일본으로 밀항을 가시면서 헤어져 살게 됐다. 당시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일본에 가시게 됐다고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시고 몇 년 후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밀항을 하는 바람에 어린 세 자매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아버지는 워낙 어릴 때 떠나서 기억이 없지만, 어머니와는 다섯 살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언제든 버스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

소통과 투쟁의 공간, 지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운동은 민중운동이 전통적으로 강조해왔던 것이다. 실제 주요한 연대투쟁을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일상 활동에서도 지역에서의 교류가 현실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삶의 곳곳을 파고들면서 사회를 극심하게 파괴하는 요즘 지역에 대한 강조가 더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다.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미군기지투쟁, 새만금 반대투쟁, 해계기장 반대투쟁 등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경험했던 김종섭은 지역의 중요성을 몸으로 익혀왔다. “지역은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시·공간의 의미가 있다. 단순히 중앙의 사업을 지역에서 집행하는 집행기관이 아니다.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갖고 모든 정치운동이나 운동들이 지역이라는 곳에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변혁운동가들의 기본적인 고민..

투쟁이란...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듣다보면 서로 다르면서 같기도 한다. 그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동질성이다. 여기저기에서 힘들게 투쟁하는 이들이 참 많다. 그들은 세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서로 비슷하면서 다른 경험들을 갖고 있다. 2001년 유미희는 효성노조 파업투쟁에 함께 하면서 그의 모든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호흡과 그 힘을 만끽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격렬하고 힘찼던 투쟁이었다. “내가 효성에 들어가서 하지 못했던 투쟁들을 거기서 다 했다고 보면 되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에너지를 다 짜냈다고 보면 되고, 그리고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사랑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아주..

서로 대화하면서 변화하는 방법

교육은 참 많은 이들이 다양한 얘기를 하는 주제중의 하나다. 기존 제도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도 매우 다양하게 시도돼 왔다. 사회적으로 가장 첨예한 쟁점 중의 하나가 교육문제인 현실에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교육을 진행하고 있을까? 80년대 중반 교사생활을 시작한 최덕현은 초반 독서모임을 하며 비판적 문제의식을 키워갔다. 그 이후 89년 전교조가 만들어지면서 해고가 이어지고, 그와 함께 시작된 학습모임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내가 생각해보면, 결정적으로 내 삶의 형태가 바뀐 것이 해고되고 나서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강원에 있는 동지 여럿이 학습모임을 했었거든요. 전교조 결성 이전부터 그 모임은 있었어요. 그게 쭉 이어지면서 그 모임에 참여했던 동지들이 다 해고됐죠. 그때는 원..

마음을 다해서

‘오세암’이라는 애니메이션 한 편이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누나와 엄마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동생이 엄마를 찾아다닌다. 엄마는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지만 누나는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동생은 “엄마를 만나도 누나는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엄마를 알아보지” 하는 고민을 하며 엄마를 간절하게 찾는다. 어느 스님을 만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러 가지만, 스님이 사고를 당해 겨울 산사에 동생이 혼자 남는다. 눈 내리는 날 동생은 먼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다해 불렀는데, 엄마가 오지 않아”라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진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 2003년 금강화섬에 ‘현장이 인정하는 집행부를 만들겠다’며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열정만 앞..

단순하게 살자

세상살이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의 생각은 점점 복잡해진다. 하지만 머리 굴릴 제주도 없고, 머리 굴려봐야 뾰족한 방법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단순무식하게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단순무식해져야 한다. 전북 부안의 섬마을 계화도에서 자란 고은식과 경기도 평택의 농촌마을 대추리에서 자란 신종원은 그냥 고향이 편해서 그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개는 다 떠나요. 제 초등학교 동창이 50명 정도 되는데, 여기서 사는 사람이 3명... 나는 떠나기가 싫더라고요. 한 번은 떠나봐야지 하고 서울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갔는데 3개월만에 돌아와 버렸어요. 나는 못 살겠더라고요.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그..

평택 대추리 신종원 이야기

2008년 7월 인터뷰 군사기지에 맞선 투쟁은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속에서 진행된다. 특히 미군기지인 경우 그 양상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격렬한 투쟁만큼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다. 미군기지 평택이전에 맞서 투쟁해왔던 신종원 팽성읍대책위 전 조직국장을 만나서 그 힘겨운 투쟁과 그 이후의 고통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신종원은 63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태어나서 계속 농사를 짓고 살아오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 천안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도 했지만 대학 졸업 후 86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시골이 어리거나 뭐하거나 일손 바쁠 땐 다 도와주고 그러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주저앉게 됐어요. ‘부모님들 농사지으니까 농사지어야 된다’ 이런 거보다도 생활이 그..

문득문득 몸서리쳐지는 배고픔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대대로 가난하다. 몸서리쳐지도록 지긋지긋한 가난을 쉽게 벋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그렇게 가난에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는 이들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생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멀고 살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조돈희는 20대 중반의 나이인 81년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현대중공업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삶에 쪼들리기 시작한다. “둘이서 쥐뿔도 가진 거 없이 살기 시작하니까 쪼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애 가지니까 입덧 시작하지... 월세 줘가면서 살아가지... 내가 벌어오는 건 많이 없지... 애 엄마가 헤프게 쓰는 것도 아니거..

“아프냐? 나도 아프다”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다. 돈도 없고 백도 없는 사람들, 어디 의지하거나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람들, 그나마 있는 몸뚱이마저 성치 못한 사람들은 이 험한 세상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상처투성이 사람들 속에서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도 또 다른 상처를 역시 숙명처럼 받아들어야 한다. 세상의 다수가 되어버린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버려서 식상해졌을까? “2005년 4월에 그 유명한 잡담해고가 발생해요. 문자로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해고사유는 잡담이다’ 이런 거예요. 그게 왜 그랬냐 하면 조장한데 ‘이거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업무적인 건의를 했는데 ‘너 그랬게 잘났냐?’ 해서 해고시켜 ..

낮은 데로 임하소서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노동자 민중과 함께 하려고 현장으로 들어갔고, 그런 흐름은 대중의 삶 속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노력의 결과 노동자 민중 속에서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농협장, 구청장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더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낮은 데서 뿜어져 나오는 샘물을 먹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샘물을 원한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다시 그 샘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아직도 많은 이들이 스스로 낮은 데서 뿜어져 나오는 샘물이 되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샘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전태일을 따라서’ 민중 속으로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