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상념 30

뜨거운 5월의 마지막 날 선선한 저녘에

올해부터 부모님이 하시던 감귤농사를 맡아서 하게 됐습니다. 이것저것 배우면서 조심스럽게 해나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유인과 전정을 하고 있습니다. 초짜가 나뭇가지를 유인하고 자르는 게 겁도 나고 힘들지만 해야할 일이기에 조심조심 해나가고 있습니다. 5시에 일어나서 명상도 하고, 간단한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사랑이 산책도 시켜주면 8시가 좀 넘습니다. 그때부터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나뭇가지와 씨름을 합니다. 6년이 되도록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나뭇가지는 천방지축입니다. 그런 나무를 살살 달래듯이 줄로 묶고, 톱질도 하고, 전정가위로 자르기도 합니다. 요즘은 열매가 막 달리기 시작하는 때라서 톱질을 하거나 전정을 할 때는 조마조마합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나무와 씨름을 하다보면 시간은 후딱 흘러버립니다..

잡다한 상념 2022.07.17

성민이가 보시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아는 사람들에게 택배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잊고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몇 분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줬습니다. 택배로 받은 걸 어떻게 이용했는지 자세하게 써서 보내준 분이 있었고 별거 아닌 내용물에 대한 답례로 귀한 선물을 보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런식으로 피드백이 되는 것도 좋고, 보낸 것보다 좋은 걸 받아서 더 좋고 그러내요. 히히 나의 행복을 공유함으로서 좀 더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 외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택배를 보냈지요. 받아보신 분은 알겠지만, 내용물은 별거 없습니다. 내가 지금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 뿐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거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너무 반응이 좋..

잡다한 상념 2022.06.18

위문편지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겨울이 되면 군인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강제로 써야 했던 위문편지였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마음을 담아서 쓰곤 했습니다. 항상 처음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군인아저씨께”라고 시작하곤 했는데, 지금은 “이름은 알지만 얼굴은 모르는 죄수아저씨께”라고 시작해야 하겠군요. ㅋㅋㅋ 몇 년 전에 구속되어 연말을 교도소에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뜨겁던 봄의 열정도 가라앉고,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길어서 싫었던 추석 연휴도 지나고,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재판도 모두 끝나고, 구치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교도소에서 겨울을 맡았습니다. 구치소보다는 교도소의 여건이 상대적으로 편하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감을 가야했고, 면회도 1주일에 한 번으로 제..

잡다한 상념 2022.05.14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2006년은 제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해였습니다. 나이 많은 여성 해고자들과 함께하면서 단 한 명이 아쉬운 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 한 명이 되는 순간 우주의 중심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 가면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나봅니다. 좀 더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봅니다. 이런 저런 고민들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내 꿈과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익숙해져 있던 것들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2007년 울산을 떠났습니다. 어느 정도의 방황을 각오한 것이었지만 너무 과감하게 사회적 관계들을 단절해버린 결과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심한 우울증..

잡다한 상념 2022.05.07

10년만의 세상나들이

1 세상을 살다보니까 어느새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버렸습니다. 어느 순간에 삶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져 발버둥치는 걸 경험했습니다. 발버둥치고 발버둥치고 발버둥치고 발버둥치고 힘을 내서 또 발버둥치고 남은 기운을 다 모아서 다시 또 발버둥쳐봤지만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욱 촘촘히 나를 옥죄어오는 세상은 무서웠습니다. 불면증, 우울증, 자살충동 이런 걸 친구처럼 달고 살았더니 감정조절장애라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고 이런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나를 보는게 두려워 대인기피증이라는 피난처로 숨어들어갔습니다. 내 친구들은 자상도해서 내 주위를 떠나지않습니다. 지겹다고 그만 좀 떠나달라고 화를 내면 내 화를 먹고 더 커져버립니다. 얘네들이 너무 무서..

잡다한 상념 2022.05.03

내가 그날 그 배에 있었다면

2014년 4월 16일 아침 8시 48분 세월호 내가 그날 그 배에 있었다면 가끔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보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준석 선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진보니 혁명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입을대로 상처입고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철갑을 두르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더욱 촘촘히 옥죄어 오는 세상에 두려움을 느끼던 내가 그날 그 배에 있었다면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을 것이고 점점 불안해지는 상황에 두려움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불신하며 밖으로 나가려 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하나’ 하는 생각은 전혀 없이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내 얼굴에 이준석 선장의 얼굴이 겹쳐지는 게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냥 무시해버렸다. 가족들을..

잡다한 상념 2022.04.30

조카랑 같이 놀기

오늘은 조카랑 놀았던 얘기 해 볼게요. 조카가 둘인데 둘째 동생이 저녁이 되면 어린이집에 맡겼던 조카랑 자주 오기 때문에 둘째 조카랑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태어난 지 20개월이 지나서 약간 뒤뚱거리면서도 잘 걸어 다니고, 발음이 가능한 몇 개 단어들을 통해 여러 가지 의사소통도 가능합니다. 6개월 전에 제주도에 내려왔을 때는 낯설어서 삼촌인 저에게 잘 오지 않았지만, 보름 정도 지나서 얼굴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익혔다 뿐이지 조카 나름대로의 서열이 있어서 조카가 웬만큼 기분 좋지 않으면 같이 놀기 어렵습니다. 조카의 서열은 엄마-아빠-할머니-할아버지-삼촌의 순서인데, 이 서열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가구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집에 갔다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지..

잡다한 상념 2022.04.23

잘가라, 2011년

1 설을 앞두고 울산에서 부고가 전해졌다. 해고자 생활 10년을 버티면서 복직의 끈을 놓지 않고 싸워왔던 그는 나이 오십도 되지 않아서 자살도 사고도 아닌 병으로 죽고 말았다. ‘질긴 놈이 먼저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멍해졌다. 당장 울산으로 가야하는데 망설여졌다.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 만나서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 죽은 이보다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망설이다가 망설이고만 있는 시간이 더 힘들어서 울산으로 향했다. 무수한 이들과 악수를 하면서도 긴장했다. 웃으면서 술을 먹으면서도 긴장했다. 그렇게 긴장 속에 밤은 깊어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떠난 영안실에서 죽은 이의 웃는 사진 앞에서 3백배를 했다. 풀린 다리를 지탱하기 어려워 자리에 누우니 긴장도 풀렸다. 조금 떨어..

잡다한 상념 2022.04.19

늦가을에 떠오르는 사람들

한 해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요즘 투쟁도 서툴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서툴렀고, 재판도 서툴렀고, 구속된 이후의 생활도 서툴렀던 사람들이 몇 년째 담장 안의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땅을 밝을 수 있는 하루 1시간의 운동시간 속에서 그들은 늦가을의 정취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요?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고, 개인사도 모르고, 고민도 모르기 때문에 혼자서 상상만 해봅니다. 그들의 투쟁이 잊혀져가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너무 외롭고 지쳐서 지난 투쟁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밖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답답한 소식들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는 수형기간을 헤아리면서 한숨 짖고 있지는 않겠지... 고립된 생활이 오래 이어져서 모든 게..

잡다한 상념 2022.04.16

오래된 사진 한 장

며칠 전 마음이 싱숭생숭 해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봤습니다. 지금의 조카들보다 어렸던 내 백일사진부터 대학시절 사진까지 많은 사진들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40년에서 20년 전 사진들을 보면서 그 시절을 생각해보는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한 장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잊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군대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기다리던 1992년 제주지역에 있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오전 두 시간 동안 진행됐던 정신지체장애인(요즘은 지적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만...) 학습프로그램에 함께 하면서 선생님들의 학습지도를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화창한 봄날, 바닷가로 놀러나가서 같이 찍었던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사..

잡다한 상념 2022.04.09